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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 잡지소개


 





『좋은생각』은 1992년 8월에 창간하여 밝고 긍정적인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를 담아왔다. 이곳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마음과 생각이 따뜻해지는 햇살과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고 흉악해진다고 느껴질 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밝고 따뜻한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그 이야기는 다른 나라가 아닌 내 엄마, 내 아버지처럼 나와 아주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지만,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가슴 뭉클한 감동이 있고, 세상은 여전히 살맛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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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특집 : 스투키

 

 

 

늘 그렇듯 아침으로 먹을 달걀 프라이를 하는 중이었다.  휴대 전화 진동 소리가 들려 방으로 가니 오랫동안 연락 없던 친구한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 대박 소식 들려줄게.” 무심히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내 첫사랑이 조만간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를 떠난 지 오래였지만, 어쩐지 그날 내내 비좁은 고시원 방만큼 마음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다음 날 저녁,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누구랑 결혼한대? 얼마나 만난 거야?”

그가 결혼할 여자는 꽃집을 운영하는 플로리스트라고 했다.

미인이래. 너 설마 신경 쓰는 거야? , 십 년도 더 지났다.”

격양된 목소리로 쉼 없이 질문하자 친구가 키득거렸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그 여자의 꽃집 앞에 서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문이 닫혔다면 차라리 좋으련만,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안에서 꽃을 다듬는 여자가 보였다. 도대체 나는 왜 그 밤중에 여자가 한다는 꽃집 상호를 검색해 한 시간 넘게 전철을 타고 간 것일까.

그리고 여자는 왜 아홉 시가 넘도록 가게 문을 닫지 않은 걸까. 순간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이건 몰래 쫓아다니는 거잖아. 미쳤어!’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여자는 내가 누군지 모르니 한번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딸랑.” 청량한 벨 소리에 여자가 날 보며 빙긋 웃었다.

…… 내일 아침 수업 준비 중이었어요. 원래 이렇게 늦은 시각까지 열진 않는데, 혹시 뭐 사러 오셨나요?” 나를 이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친근한 목소리였다.

동네 사람인데 지나가는 길에 화분을 살까 해서요.” 나는 쓸데없는 말까지 덧붙이며 어색하게 둘러댔다.

선반 위 화분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얼굴선이 꽃처럼 고운 여자를 곁눈질했다. 내가 한참을 서성이자 여자가 상냥히 말을 걸었다.

사고 싶은 게 따로 있나요?”

그런 건 아니고요. 추천해 줄 만한 게 있을까요?”

…… 혹시 스투키는 어떠세요? 공기 정화에 좋은 데다 신경을 많이 안 써도 혼자 잘 자라는 식물이에요.”

여자의 추천대로 선반에서 제일 작은 스투키 화분을 골랐다.

저도 방에서 키울 땐 이런 작은 게 좋더라고요.”

여자는 정성껏 화분을 싸 주며 흐드러진 벚꽃 같은 웃음을 지었다.

어떤 생각을 하며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여자를 만나기 전 쿵쿵 뛰었던 심장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아 안도했다.

오자마자 스투키를 책상에 두고 물을 주었다. 여자의 말대로 누군가 신경 쓰지 않아도 혼자 잘 자라는 스투키가 나를 도왔을까? 그해, 나는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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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특집 : 노량진 블루스

 

 

스물여섯,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넘도록 백수였다. 연극하겠노라고, 글을 쓰겠노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공모전마다 떨어지기 일쑤였다. 삶은 내게 왜 가혹한가, 내 청춘은 왜 이리 잿빛인가 자책하며 살았다. 그 무렵 우리 가족은 노량진으로 이사했다.

노량진 하면 길거리마다 즐비한 컵 밥집과 포장마차, 그 앞에 앉아 우걱우걱 밥을 먹는 고시생들이 떠올랐다. 부모님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해서라도 내 밥벌이는 해야 했기에 한 고시 학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첫날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두 곳으로 나뉜 자습실에서 쉰다섯 명씩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공부했다. 모두 고시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지각하거나 몰래 졸면 가차 없이 벌점을 받았다. 벌점 20점이면 강제 퇴실이었다. , 하루 두 번 모래시계를 사용해 15분간 낮잠 잘 수 있었다.

내가 할 일은 학생들 출석을 확인하고, 자는 이들을 깨워 주는 것이었다. 공부를 시키는 것인지 사육하는 것인지, 학원 규칙을 듣는 순간 이곳에 이력서 넣은 걸 후회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딱 한 달만 견뎌 보자.’ 하고 관리 주임이 되었다.

고시생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힘겨워 보였다. 하루 열다섯 시간씩 공부하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매일매일을 간신히 견뎌 냈다. 조는 학생들을 깨워 벌점 줄 때마다 왠지 모를 죄책감이 들었다. 나날이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더 이상 못하겠다 싶었을 때 함께 일하던 관리 교수가 내게 고백했다.

주임님, 사실 저도 글을 쓰고 있어요. 신기하게 여기엔 다 그런 사람만 모였네요. 주말 주임님도 배우 지망생이고, 평일 오후 주임님도 예전엔 소설가가 꿈이었대요.”

놀라웠다. 한 공간에서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을 이토록 많이 만나다니. 그때부터 나의 노량진 생활은 달라졌다. 꿈이 같은 사람들이 있어 일하는 게 즐겁고 행복했다. 내가 변하자 학생들도 달라졌다. 무뚝뚝하고 내성적인 줄만 알았던 학생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쪽지와 간식을 건네주거나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등 관리 주임과 학생의 관계를 떠나 친해졌다.

그리고 지난 6, 나는 일하며 겪은 경험담으로 노량진 고시생이 나오는 연극을 써 대학로 무대에 올렸다. 학원 사람들도 공연을 보고 데뷔를 축하해 주었다. 노량진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답답하고 칙칙하기만 했던 노량진을 이젠 누구보다 사랑한다. 노량진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지만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의 청춘이 여기 한구석에 남으리라. 언젠가 우리 모두 꿈을 이루고 노량진을 떠날 수 있기를!

주진영 님 | 서울시 동작구


짜장면과 케이크와 아름다운 싸움

 

박성우 님 | 시인

 

 

마을버스 정류장 모퉁이에 구둣방이 있다. 한 사람이 앉을 수는 있으나 누울 수는 없는 크기를 가진 구둣방이다. 늦은 점심을 먹고 구둣방에 갔을 때였다. 구둣방 할아버지는 수선용 망치로 검정 하이힐 굽을 두드리고 있었다. 한데, 웬일인지 구둣방 귀퉁이에 짜장면 그릇 세 개가 포개져 있었다.

, 이거?” 구둣방 할아버지는 위쪽 빵집 젊은 사장과 아래쪽 만두 가게 아저씨가 와서 짜장면 송년회를 해 주고 갔다고 했다. 구둣방이 좁아 둘은 서서 먹고 구둣방 할아버지는 앉아서 먹었단다.

구둣방 왼편에 놓인 서랍장에는 케이크 한 조각이 얌전히 올려져 있었다. 검은 구두약 통 두 개와 한 뼘 반 정도 거리를 둔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 누가 놓고 간 거냐고 묻지 않아도 누가 놓고 간 것인지 알 수 있는 하얀 생크림 케이크 한 조각, 애써 새하얘지고 있었다. 아내의 구두를 구둣방에 맡긴 나는 빵집으로 가서 빵 몇 개를 골라 나왔다. 아내의 구두를 찾아갈 때는 만두 가게에 들러야겠다고 생각해 보는 것만으로도 세밑이 따뜻해져 왔다.

닦음이 아니라 딲음이라 쓰인 글자가 딱 어울리는 구둣방, 할아버지는 언제나 가죽 앞치마 두르고 앉아 구두를 만진다. “한 삼십 년은 족히 넘었제!” 해어지고 터져서 가죽 쪼가리를 덧대고 또 덧댄 가죽 앞치마, 할아버지는 오른손잡이여서 왼쪽이 더 닳았지만 닳은 쪽이 더 빛나 보였다.

구두 들고 오랜만에 할아버지 구둣방 간다. 구둣방 할아버지는 가죽 앞치마에 보라색 가죽 쪼가리를 새로 덧대 두르고 있다. 왼쪽 무릎 위에서 둥글게 빛나고 있는 보랏빛, 머지않아 검은빛으로 반들반들 빛날 터이다. 구둣방 할아버지가 구두를 수리하는 동안 나는 가죽 앞치마가 펼쳐 내미는 구둣방 할아버지의 시간을 받아 들고 천천히 걸어 본다.

그래, 구둣방 할아버지는 단순히 구두를 수선해 주고 닦아 주는 사람이 아니다. 그대와 내가 만질 수 없는 바닥까지 맨손으로 만져 주는 사람이다. 자신 있게 걷게 하여 그대와 나의 내일을 빛나게 해 주는 그런 사람.

생각하다 보면, 별일은 아니었으나 별일이기도 했던 일이 떠오른다. 농사일하다가 허리를 삐끗해 입원했던 노모를 한 달여 만에 모시고 시골집에 갔을 때였다. 동네 엄니들은 그간 시골집 마당 텃밭에 콩을 심어 키워 두었다. 아무나 무단으로 대문 밀고 들어와 누구는 콩을 심고 가고 누구는 풀을 매고 갔다. 누구는 형과 내가 대충 뽑아 텃밭 옆 비닐하우스에 대강 넣어 둔 육쪽마늘과 벌마늘을 엮어 두고 갔다.

어느 엄니는 노모가 애지중지하는 길 건너 참깨밭 풀을 줄줄이 잡아 하얀 참깨꽃이 주렁주렁 매달리게 했다. “하이고 얼매나 욕봤디야.” 누가 더 욕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노모도 웃고 동네 엄니들도 웃었다. 노모와 동네 엄니들은 콩잎맹키로 흔들림서 깨꽃맹키로 피어났다.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동네 엄니들의 아름다운 무단 침입을 소상히 파악하여 다가오는 명절에는 꼭 어린것과 아내를 앞세우고 가 대문 밀치리라, 마늘쪽 같은 다짐을 해 보던 것이었는데 노모와 동네 엄니들은 도란도란 반갑게 얘기하다가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나를 보면서 한결같이 여간 바쁠 턴디, 어여 가 봐야 할 턴디, 그리도 밥은 묵고 가야 할 턴디.” 했다.

또 생각하다 보면, “집이 누구 지시오? 집이 누구 지시오?” 바깥일 보고 잠깐 쉬러 집에 들렀을 때의 늦가을 오후가 떠오른다. 아흔 넘으신 가춘(양봉순) 할매가 나를 찾던 목소리 들려온다. “집이는 밤낭구랑 대추낭구랑 읎지?” 몇 번을 싸우다가 밤 여남은 개와 대추 한 알만 받고 가춘 할매를 겨우겨우 돌려보내던 아름다운 싸움, 따뜻하게 지나간다.

길가에 줄지어 선 회화나무 빈 가지를 막무가내로 흔들던 바람이 내게로 일제히 몰려와도 나는 결코 춥지만은 않다고 여기며 걷던 걸음을 마저 뗀다.

구두가 이 지경이 되도록 신었느냐는 핀잔, 다시 한 번 덤으로 들으면서 나는 비타민 음료 한 병을 까서 구둣방 할아버지에게 내민다. 수리한 구두를 내밀려던 구둣방 할아버지는 닦이지도 않을 가죽 앞치마 끝자락에 손바닥과 손등을 쓱쓱 문지르고 비타민 음료 받아 든다. 천 원을 까 주겠다는 구둣방 할아버지에게 수고비 천 원 더 보태 내밀고 구두를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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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특집 : 500엔 동전

 

 

스물세 살 되던 해, 나는 대학을 휴학하고 부모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떠났다. 그때껏 다달이 용돈에 책값, 술값, 옷값까지 부모님 지갑을 탈탈 턴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늘 외롭다는 둥 삶이 공허하다는 둥 툭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로 투덜댔다. 단짝은 그저 웃었고 엄마는 사치스러운 고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서글펐다.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첫해를 보내고 방학을 맞아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무리 철없는 딸이지만 부모님 얼굴에 가득한 수심까지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인지 묻자 엄마는 머뭇거리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하는 일에 문제가 생겨 당분간 돈을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내 공부에 지장 주지 않겠다는 엄마를 보며 태어나 처음으로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대책도 없이 앞으로 유학비는 내가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곤 씩씩하게 손을 흔들며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그건 답 없는 자신감이었다. 당장 생활이 막막했다. 그렇게 난생처음 아르바이트했다. 동네 역 앞의 자그만 빵집이었다. 일을 구해 한시름 덜었으나 월급날까지 버텨야 했다. 말 그대로 돈 한 푼이 아쉬웠다.

길에서 나눠 주는 판촉용 휴지를 받아 쓰고, 차비를 아끼려 열 정거장까지는 무조건 걸었다. 기숙사에서 지내며 아침저녁은 해결했는데 문제는 점심이었다. 편의점에서 제일 싼 100엔짜리 호빵으로 배를 채우면서도 마지막 자존심에 친구들에게는 호빵을 너무 좋아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여느 때처럼 아르바이트 가는 길이었다. 멍하니 바닥을 보며 걷는데 길옆 하수구 안쪽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500엔 동전이었다. 그 돈이면 100엔짜리 호빵을 오 일 동안 먹으니 일주일 치 식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수구는 너무 더러웠다. 전날 비가 와 흙탕물이 가득해 질척거렸다. 더구나 큰길이라 오가는 사람도 많았다. 용케 돈을 발견했지만 하수구에 손 넣을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그 앞을 지나며 고민하다 결국 손을 넣었다. 담배꽁초와 오물이 뒤범벅된 하수구를 휘저어 동전과 흙탕물을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그리고 무작정 달렸다. 한참을 뛰어 인적 드문 골목에 들어섰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그래도 돈을 얻었다. 여전히 떨리는 손을 들어 가만히 펴 보았다. 그 안에는 500엔 동전이 있었다. 빛나는 장난감 동전이.

갑자기 헛웃음이 났다. 기가 막히고 한심했다. 울고 싶은데 눈물도 나지 않았다. 한참을 서 있으니 불현듯 떠올랐다. 일평생 자기 힘으로 딸을 키우며 삶을 일군 엄마, 학업과 아르바이트 두 개를 병행하며 학비는 물론 용돈까지 벌었던 친구……. 그들 앞에서 외로움이니 삶이니 하며 왜 그리 어리광을 부렸을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삶의 고달픔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정말 힘들 때는 하루하루가 버거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비로소 나는 자랐다. 한 사람으로서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을 몸소 느꼈다. 그날의 500엔 동전은 내게 호빵 대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깨달음을 주었다.

이수진 님 | 서울시 광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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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특집 : 발효의 맛

 

 

처음 서울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때는 추운 겨울이었다. 고속버스가 콧김을 내뿜으며 터미널을 빠져나가자 나는 창밖으로 멀어지는 고향의 단편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어깨 펴고 당당히 돌아오겠다며 어머니와 굳게 약속하고 떠난 상경이었다.

졸업 후 번번이 취업에 실패해 어머니와 같은 밥상에서 숟가락 들 낯이 없었다. 면접 날이면 어머니는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밥상을 차리고 국밥집으로 나섰다. 밥상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갓 담은 김치가 빠짐없이 올라왔다.

그 무렵 일찌감치 취업해 서울로 떠난 대학 동기가 연락했다. “너도 광고 일 해 볼래?” 동기는 명함을 보내곤 자기 집에서 살며 전기세만 내라고 했다.

서울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자 장대비가 내렸다. 겨우 버스를 갈아타고 큼지막한 배낭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어머니는 내가 서울행 버스표를 내밀자 배추부터 꺼냈다. 무를 깍둑깍둑 썰고 찹쌀 풀을 쑤었다. 배낭에 든 배추김치와 깍두기 냄새가 버스에 진동하는 듯했다. 왠지 창피해 배낭을 꼭 껴안았다. 정류장에 내리니 동기가 마중 나와 있었다.

오늘 입사할 신입 사원은 모두 일곱 명이야.” 입사와 신입 사원이란 말에 명치가 간질간질했다. 지하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열 명 남짓한 사람이 나와 똑같은 눈빛으로 강의를 들었다. 곧 내 책상에 자료들이 쏟아졌고 밤늦도록 강의실을 옮겨 다니며 뜻 모를 교육을 받았다. 일명 다단계였다.

동기 집 냉장고에 김치를 넣고 꼬박 다섯 달을 밤낮없이 일했지만 손에 돈을 쥐지 못했다. 하루 서너 시간도 못 잔 탓에 김치 먹을 틈조차 없었다. 딱 일 년이 지나서야 그곳을 빠져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른 아침, 쫓기듯 짐을 싸는데 갑자기 김치가 생각났다. 일 년 동안 부풀었다 숨 죽기를 반복하며 숙성된 김치는 오랫동안 못 본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처럼 애가 닳았을 터였다. 뚜껑을 열자마자 시큼한 냄새가 훅 달려들었다. 손으로 쭉 찢어 입안에 넣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매콤 새콤한 맛이라니!

김치 통을 바리바리 싸 들고 비 오는 서울 한복판을 정처 없이 걷는데 누군가 내 등을 툭 쳤다. “저기요…….” 놀라 돌아보니 교복 입은 여학생이 불안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피 아닌가 해서요.” 붉은 액체가 내 엉덩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배낭은 이미 김칫국으로 흥건했다. 나는 오도 가도 못한 채 보도블록 한가운데 퍼더앉았다. 내가 갓 담은 김치를 입에 넣고 엄지를 척 들어 보이면 흐드러지게 웃던 어머니…….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좌절과 낙담으로 숨어 지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떤 타박도 않고 늘 그랬던 것처럼 새벽이면 솥을 씻고 고기를 삶고 김치를 담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마음을 다잡았다. 정신 차리고 입사 시험에 매달린 끝에 운 좋게 취직해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겨울의 실패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단단해지지 못했으리라.

어머니, 저 이제 새 김치 안 좋아합니다. 몇 년 푹 삭은 게 더 맛있어요. 신 김치에 싱싱한 고등어 뭉텅뭉텅 썰어 넣고 조려 먹어요.” 그날 이후 신 김치만 찾는 나에게 어머니는 이랬다 저랬다, 썩을 놈.” 한다.

김성태 님 | 부산시 동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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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특집 : 십칠 년 만에 마주 앉아

 

병원에 같이 가 줄 수 있니?”

오랜만에 전화한 어머님이 물어보셨다. 얼마 전부터 속이 쓰리고 소화가 잘 안된다고 했지만 여느 때처럼 얼른 병원 다녀오세요.”라는 말로 걱정을 대신했다. 속으론 원래 엄살이 심하시잖아, 별일 아니겠지.’ 했다.

한데 어머님이 병원에 혼자 다녀오신 모양이었다. 의사는 큰 병원에 가서 대장과 위 검사를 받으라 했다. 결과 나오는 날, 떨리고 걱정돼 차마 혼자 가지 못하고 큰며느리인 내게 전화하신 것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맘고생 하셨는지 가뜩이나 마른 몸은 더 앙상했고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다른 가족한테는 알리지 말라셨기에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며칠을 보냈다.

만나서 별말 없이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님은 첫 손주인 우리 아들이 대학 가는 것까지 보고 싶었는데 안될 것 같다고 하셨다. 난 선뜻 어머님 손을 잡으며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 아닐 거예요.”라고 안심시켜 드리지 못했다.

우리는 사이좋은 고부가 아니었다. 결혼 후 몇 년간 같이 살았는데 서로 주장만 앞세우며 양보하지 않았다. 어머님은 며느리가 참고 따라야 한다 하셨고, 나는 틀린 걸 틀렸다고 하는 게 나쁘냐며 사사건건 말대꾸했다.

골이 깊어져 남편, 시동생까지 불편해하고 날로 언성이 높아질 즈음 분가했다. 장남과 따로 살 수 없다는 어머님 말을 거역하고 방을 얻었다. 어머님은 그 일을 두고두고 괘씸해했고 한동안 얼굴도 보려 하지 않으셨다. 시간이 흘러 전화도 하고, 명절이나 생신 때 찾아뵈었지만 살가운 정을 나누지는 못했다.

피 말리는 시간이 지나고 의사 앞에 앉았다. “많이 걱정했는데 이상 없으시네요. 혈압만 조심하세요.” 딱 오 분 만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무사히 복귀했다. 긴장한 탓에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는데 그제야 시장기가 돌았다.

근처 음식점에 가서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팥 칼국수에 만두도 시켰다. 다행히 입맛에 맞아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난 만두 접시를 어머님 쪽으로 밀었다.

뭣하러 만두까지, 돈도 많이 나올 텐데…….”

만두는 서비스예요. 걱정 말고 드세요.”

어머님을 생각해 거짓말했다.

단 둘이 집 밖에서 밥을 먹은 건 결혼하고 처음이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일까.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이 생각나서일까.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치아가 부실해 딱딱한 것을 못 드시는 모습이, 홀로 자식 키우느라 깊어진 주름이, 자식들이 힘들게 번 돈 아까워 뭐든 싫다고 하는 마음이 보이기 시작했다. 십칠 년 만에 마주 앉아 어머님을 제대로 보았다.

어머님 역시 큰 병 걸렸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사이 안 좋은 며느리를 떠올린 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 아닐까.

아비는 요새도 술 많이 먹냐? 언제 철들는지……. 사돈총각은 올해 몇 살이야? 얼른 결혼해야 돌아가신 사돈이 기뻐하지.”

평소에 너무 짜게 드시지 마세요. 손주가 결혼해서 아이 낳는 것도 보셔야죠.”

어머님은 내 얼굴을 잠깐 쳐다보더니 웃으며 오냐.” 한마디 하셨다. 먼 길 돌아 이제 제자리를 찾은 듯하다. 십칠 년 만에 비로소 진짜 가족이 되었다.

박윤희 님 | 경기도 수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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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특집 : 자영업을 한다는 것

 

팥빵을 만들 때마다

 

우리 제과점 단골손님 중 아흔 살 정도 되신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늘 제과점을 지나쳐 공장 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지, 거기 아니고 이쪽으로 오세요.”

매일 말씀드려도 소용없었다. 나는 빵을 만들다 말고 할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그사이 빵이 탄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할아버지는 오백 원짜리 팥빵을 좋아하셨다. 팥빵과 물을 드시며 삼십 분 넘게 앉아 있을 땐 불편하기도 했다. 한 명 앉을 자리밖에 없어 할아버지가 계시면 빵을 포장할 곳도 마땅치 않아 여러모로 일이 늦어졌다. 손님에게 가라고 할 수도 없어 답답할 때가 많았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텔레비전을 틀어 달라, 물 좀 달라, 내 얘기 들어 달라며 이것저것 요구하셨다. 사정을 설명드려도 통하지 않았다.

한번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 할아버지 안 오시면 좋겠다. 일에도 방해되고 우리를 꼭 감시하시는 것 같단 말이야.”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런 마음으로 빵 장사하는 거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도 먹고살려고 하는 일인데…….’ 싶어 불만이 쌓였다. 할아버지가 가시면 어머니랑 말다툼까지 했다.

몇 주가 지났을까? 자주 오시던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 가게를 찾을 땐 귀찮았는데 오랫동안 안 보이시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늘은 할아버지 오시겠지?” 나와 어머니는 날마다 서로에게 물었다. 팥빵이 먹음직스럽게 잘 나오면 할아버지 생각이 더욱 커졌다. 미운 정이 무섭긴 한가 보다.

그러던 중 제과점에 온 할아버지 딸이 하는 말을 들었다.

우리 아버지, 이 집 팥빵을 제일 좋아했는데 이제 드실 수가 없네.”

가슴이 철렁했다. 갑자기 미워했던 할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팥빵을 드시며 흐뭇하게 웃던 하회탈 같은 얼굴이 잊히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 팥빵을 먹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그 뒤로 팥빵을 만들 때마다 할아버지 얼굴이 아른거린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팥빵 세계 최고로 만들겠습니다. 할아버지 계신 곳까지 전해지도록 말이에요. 옹졸했던 저를 용서해 주세요.”

고동석 님 | 대구시 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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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특집 : 취미의 발견

 

나무를 살리는 일

 

색을 좀 칠할까? 네가 할래?”

그냥 이게 나아. 새들이 색을 아나?”

주말에 공원에서 한 아름 들고 온 나뭇조각으로 아들과 새집을 만들었다. 지난 봄맞이 축제 때 거대한 나무 인형을 만들고 난 자투리였다. 시민들이 가져가게끔 놓았기에 쓸 만큼 들고 와 이리저리 맞추니 그럭저럭 새집 모양이 되었다. 수월한 작업은 아니라 망치질 몇 번에 땀이 흘렀지만 완성된 걸 보니 뿌듯했다. 색까지 입히면 근사할 것 같아 넌지시 건넨 말에 아들은 내가 놓칠 뻔한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더 예쁘게 만들고픈 마음은 필요 이상의 허영이었다.

나는 쓸 만한 나무가 보이면 주워 오곤 한다. 몇 년 전, 누군가 이사 도중 버리고 간 선반을 재활용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깨끗이 닦으면 제법 멀쩡해 보였다. 하지만 집으로 가져와 구석구석 닦으니 역시 칠이 벗겨진 데가 많았다.

다시 버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들이 대뜸 이거 파랗게 칠하자.” 하고 말했다. 아들은 방에 빨강, 노랑, 초록 책장만 있고 파란색은 왜 없냐며 종종 푸념했다. 주워 온 선반으로 기어이 파란색 가구에 대한 원을 풀고 싶었나 보다. 아들 덕에 내 고민도 해결된 셈이니 그 기지를 넙죽 받았다.

이후 아파트 입구에 버려진 가구가 있으면 습관적으로 들여다보았다. 바퀴 달린 이동식 선반, 독서대, 디브이디장 등이 세간으로 화려하게 입성했다. 상태에 따라 광칠을 해서 반들반들 윤기 내고, 아이들이 쓰는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입히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꾸미고 모양내는 데 열중했다. 나무 본연의 멋에 끌린 건 목수 일을 시작한 친구를 만나면서부터다.

결혼하고 원주로 간 친구는 목수가 되었다. 오랜만에 본 탓에 잠시 서먹했지만 나무를 화제 삼으며 서서히 가까워졌다. 친구는 목수 일을 배우면서 겪은 고단한 일상을 풀어 놓았다. 시종 진지하고 따스한 눈빛으로, 고독한 작업을 하며 단련된 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스승에게 받았다는 손때 묻은 귀한 연장을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는 그날 하루를 나무 이야기로 촘촘히 메워 나갔다.

얼마 전 읽은 책에 이런 구절이 나왔다.

수령 천 년의 나무를 베어 놓고 적어도 천 년 이상 가는 건물을 짓지 못하면 나무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다.”

자연을 즐기는 일에 익숙할 뿐 자연을 살리는 데는 무관심했던 내게 무척 의미 있게 다가왔다. 친구는 나무를 쓰기 위해서는 먼저 느끼고 알아야 한다고 했다. 수령 천 년의 역사를 오롯이 느낄 줄 안다면 그 나무를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아들과 새집을 달면서 생각했다. 자연에서 온 것을 이유 없이 버려지지 않게 하겠다고, 시간이 걸리고 품이 들망정 쓰임새를 찾아 주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겠다고. 나무와 함께하는 나의 취미가 요즘 더 좋아진다. 올해는 옥상 처마 밑에 달아 놓은 새집에 귀여운 박새 부부가 찾아와 둥지를 틀고 새 생명을 맞이할 것만 같다.

최현정 님 | 경기도 과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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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일기 : 부모가 되는 길

첫아이를 낳고 몇 년 후, 다큐멘터리를 보던 아내가 불쑥 입양 이야기를 꺼냈다.

세상에 부모를 기다리는 아이가 저렇게 많은데 굳이 내 핏줄 고집하며 또 낳을 필요 있을까? 우리만 변함없으면 되잖아.”


평소 아내의 심성을 잘 알기에 그 이야기를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아내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유독 엄마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아내는 첫아이를 낳고 옷을 새로 사 준 적이 거의 없었다. 늘 주변에서 얻어 입혔고 백일이나 돌잔치 등 기념일도 가족들과 단출히 보냈다. “당신은 아이에게 뭘 해 주고 싶지 않아?” 어느 날 궁금해서 물었다.


그건 부모 욕심 아닌가? 돈 들여 요란스럽게 하는 게 아이를 위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에게나 소중한 아이지 상관없는 다른 사람까지 불러 박수 치게 하고 봉투 받는 일을 왜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아내는 냉정할 정도로 객관적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내는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했고, 잘못한 일은 가슴 아파도 엄격하게 교육했다. 그런 아내였기에 나 또한 같은 마음으로 입양을 생각했다.


몇 달간의 심사와 교육을 거쳐 딸을 입양했다. 생후 한 달 된 갓난아기였다.

꼬물꼬물 작은 손과 발이 배냇저고리 안에서 버둥거렸고, 배고플 때마다 젖꼭지를 찾아 입을 달싹이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첫아이를 키운 경험이 있어 서툴진 않았지만, 갓난아이를 다시 키우는 일은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렇게 키운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딸은 어려서부터 입양에 대해 알았는데 최근 들어 궁금한 게 많아졌다. 친부모는 어디 있는지, 왜 엄마 아빠가 자신을 데려왔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물었다. 솔직히 나는 그런 날이 올까 두려워 딸이 커 가는 걸 마냥 기뻐할 순 없었다. 늘 어리고 순진한 철부지이기를, 아무것도 몰라서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아내가 딸을 목욕시킬 때였다.


여기 배꼽이 있다는 건 누군가 널 낳았다는 증거야. 그건 분명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지. 비록 널 키울 수 없었지만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 이유가 아니었다면 엄마 아빠가 널 만날 수 없었겠지. 낳아 준 분도 엄마야. 너를 열 달 동안 배 속에서 잘 키웠다가 예쁘게 낳아 주었어. 엄마는 널 낳아 주지 못했잖아. 그래서 그 엄마가 정말 고마워.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며칠 뒤, 딸이 그림을 그려 머리맡에 붙여 두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해맑게도 날 낳아 준 엄마.”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당황해서 아무 말 못하는데 아내가 설명해 주었다. 딸이 울면서 낳아 준 엄마가 보고 싶다 했단다. 입양 기관에 알아보았지만 어려울 것 같다는 통보를 받고 딸과 그림이라도 그려 보기로 했다는 것이다. 딸을 많이 닮지 않았을까 하는 단서만으로 눈, , 입을 그리고 딸이 좋아하는 머리 모양을 넣었는데 그걸 본 딸이 이렇게 말했단다. “? 엄마랑 똑같네.”


아내는 그 말에서 모든 해답을 찾았다. 입양 사실을 숨기면 두려울 일도, 속상할 일도 없겠지만 그건 부모 입장이며, 아이는 비록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커 가면서 스스로 길을 찾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 길에 변함없이 함께하면서 아낌없이 사랑해 주면 딸의 길 찾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재성 님 | 강원도 원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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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월호 목차


<특집 내 생애 가장 빛난 시간>

그런 날이 있습니다뭐가 그렇게 좋은지 종일 싱글벙글했습니다첫 데이트였나, 집을 장만한 날이었나, 시험에 합격한 날이었나, 일이 잘된 날이었나

생애 가장 빛난 날은 언제였나요?  그 후 어떻게 되었나요그 빛난 시간의 빛을 다시 쏘아 올려 주세요모두 보고 함께 행복해지게요.

 

동행의 기쁨감정은 선물입니다 감정 코칭 전문가 함규정 님

 

꽃길 우체통|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정용철 님

햇살마루| 민물 매운탕은 늘 뜨겁다-전동균 님

논산 일기| 시간의 마술-박범신 님

한비야의 뜨겁게 몰두했던 순간들

나를 흔드는 한마디|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군화와 고무신| 오일병 사건

2016년 좋은생각 캠페인| 고백합니다

 

이오아이| 비단이 선생님 외

그러나 수기| 외사랑으로 크는 아이들

좋은님 시 마당| 연필 잘 깎는 남자

청춘에게| 적성은 발견되는 것

일터에서| 행복 출근길

새벽햇살| 기억 속의 부모님

좋은님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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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필자

조정임 님 경주 우체국 지원과장

김현성 님 여행가

문태곤 님 건설 엔지니어

김정연 님 가수,방송인

박인옥 님 유머 플러스 소장

엄환섭 님 집배원,시인

김보경 님 물리치료사

김성래 님 남양주 구룡초 교사

박용현 님 충남 야생 동물 구조 센터 재활사

지은주 님 <결혼하고 연애 시작>저자

이미향 님 스피치 강사

백윤정 님 첼리스트

최임호 님 한국 수산 자원 관리공단 선임 연구원

이소희 님 마을 변호사

최성혜 님 방송 작가

문송천 님 카이스트 교수

최일주 님 21세기 성공 계발 연구원 원장

정인섭 님 음악 칼럼니스트

박선미 님 동화 작가

장동수 님 메디컬 일러스트레이터

이채원 님 소설가

이정미 님 제이엠그린 대표

성기수 님 국립 생물 자원관 외부 연구원

베리웰시 님 숙명여대 객원교수

이동규 님 파이어 마커스 대표

김민태님 다규멘터리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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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생각 (2015년 12월호) 목차]

특집 | 우여곡절 끝에 이룬 성취
심리학자 데니스 웨이틀리는 “쉽게 이룬 것보다 우여곡절 끝에 성취한 일이 더 오래간다.”라고 말합니다. 고군분투한 시간이 초심을 잃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7전 8기의 도전, 끝이라 생각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아 이룬 성취 등 여러 난관 속에서 열매 맺은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동행의 기쁨 | 당신의 별을 찾아서
천체 사진가 권오철 님

꽃길 우체통 | 희망 시계-정용철 님
햇살마루 | 이 겨울에 듣고 싶은 이야기 - 정진홍 님
논산 일기 | 가을이잖아요-박범신 님
한비야의 뜨겁게 몰두했던 순간들
2015년 좋은생각 캠페인 |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다
군화와 고무신 | 사오정이 들은 것
그러나 수기 | 그 여름의 추억
마음과 마음 사이 | 가장 행복한 사람-김철권 님
이오아이 | 사이다 번개 외
겸이 가족 이야기 | 손 씻기
좋은님 시 마당 | 오래된 연인
생각이 자라는 그림 | 세 번째 의자
새벽햇살 | 다시 태어날 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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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님 메아리

이달의 필자
정진홍 님 | 서울대 명예 교수
아라키 준 님 | 문화 해설사
장옥관 님 | 시인
김성희 님 | 주얼리 디자이너
전철근 님 | 가수, 택시 기사
조성진 님 | 연애사 대표
김혜지 님 | 관제사
김다은 님 | 소설가
미 노 님 | 여행 작가
정초신 님 | 영화감독
김승진 님 | 선장
탁경국 님 | 변호사
김금재 님 | 전북대 간호대학 명예 교수
민진희 님 | 원 월드 아카데미 명상 트레이너, 자이 요가 원장
유진옥 님 | 기관사
강병원 님 | 극작가
육영오 님 | 예술가
이영철 님 |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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